종말론 첫 시간에 나누었던 오래 전 이야기가 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교실을 비운 사이, 교실 안은 난장판이 되어갔다. 책상 위로 뛰어 다니는 녀석들, 소란스러운 교실은 이미 통제 불능이었다. 반장의 소리도 먹히지 않아, 나는 내심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을 때, 상황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그래서 살며시 교실 밖으로 나가, 복도에 홀로 서 있었다. 곧 담임 선생님이 오셔서 물으셨다: "왜 밖에 나와 있어?" 차선채 선생님은 형님처럼 친근한 분이였다. 대답: "교실 안이 너무 시끄러워서요..."
담임 선생님은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대나무 자로 한 대씩 머리를 쥐어 박았다. 나는 면제 받았고... 선생님이 없는 상황 속에서 잠깐 미래를 미리 바라본 덕분에 벌을 면하였다. 종말론의 중요한 교훈은 장차 있을 미래의 상황을 미리 바라 보는 데 있다.
우리에게 종말은 두 가지로 경험될 것이다. 하나는 죽음의 경험, 둘째는 죽음 후의 심판이다. 짦은 이 세상의 삶의 결과로,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축복의 삶으로 갈라지고 만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의 짧은 삶은 영원한 삶의 준비라 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언어, 행실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짧지만, 심원한 삶을 살고 있다.
현대인의 의식 속에 영원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것 같다. 당장 눈 앞의 성취와 행복에 도취되어 사는 것 아닌가? 종종 중세 시대 사람들의 의식이 생각난다. 현재 보다는 내세의 관심 속에서, 내세를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중세의 뾰죽한 고딕 양식의 건물은 하늘을 사모하는 마음의 표현이라 한다.
현재의 삶의 깊이와 차원을 결정하는 것이 현재 안에 있지 않고, 다가오는 미래에 있다는 것을 설파한 사람은 "Theology of Hope(희망의 신학)"을 썼던 몰트만이다. 아무리 현재 속에서 의미를 찾아도 장차 죽음과 심판을 견디지 못하면, 무의미하고 허망할뿐이다. 온갖 쾌락과 영화를 맛보았던 솔로몬의 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꼭 몸으로 경험하고 알려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다. 지혜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교훈을 듣는다. 나이 들어 마음 깊이 들어오는 말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사느니라." 2천년 전 주님의 종이 남겨준 한 마디가 마음 깊이 들어온다.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닌 것, 허무한 것을 좇아 뛰고 달려갔다는 아픈 고백을 하게 된다.
종말론적인 삶은 죽음과 죽음 후의 심판을 미리 보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과 심판을 대비하고, 설명해 주지 못하는 삶은 허무하고 어리석을 뿐이다. 젊은 날에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많은 세월을 보낸 후에 알게 된 것, 자랑할 것도 못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이 감사하게 여겨진다. 오늘 수업 시간에 반복해서 전달된 것은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삶은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김광석 노래의 다른 버전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