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말씀은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이다. 이런 말씀은 주시는 분은 사도 바울이다. 그는 감옥에 갖혀 불편한 삶을 살면서도 기쁨의 삶을 실천하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도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그 상황이 결코 기뻐하고 평안할 상황은 아니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갖혀 살고 있었고, 예수님은 다음 날 십자가의 길을 가실 예정이었다.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고, 평안의 삶을 사셨던 분들이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전하고 있다. 기쁨과 평안의 삶은 상황의 열매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기쁨과 평안의 삶은 상황을 초월한 신비한 능력의 삶이다.
사도 바울의 말씀은 명령형이라는 것을 주목한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명령형으로 주어진다. 그것도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 그 비결은 "주 안에서"에서 찾을 수 있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 예수님의 통치와 보호 속에 살고 있음을 믿고, 경험하고 있다.
악과 재난이 깔린 세상을 살면서, 이날까지 주님의 보호 속에 살아왓고,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일꾼의 신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존귀하고 복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의와 진실과 관용으로 살기 원한다. 이런 삶의 열매는 우리 안에 거리낌이나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성경 여러 곳에서 읽는 말씀이다.
하루 하루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 살고, 그를 섬기는 삶처럼 존귀한 삶이 어디 있을까? 이 거친 세상 속에서 존귀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까? 그런데 왜 기독교는 위축된다는 것일까? 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을까? 특별히 한국이나 미국에서 젊은 층들이 교회를 등진다는 말을 듣는다.
이 귀하고 복된 삶을 알고는 있을까? 무엇 보다도 심령의 자유와 평안을 알고 있을까? 우리를 항상 지켜 보시는 하늘의 하나님의 시선 속에 사는 행복을 알까? "악한 자가 감히 만지지도 못하는 삶"을 사는 안전을 알까? 참 신자라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에서 누리는 자유와 평강을 알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할 것을 권하고 명한다. 우리가 기쁨의 삶을 살아야 세상 사람들은 우리 신자들과, 우리 믿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참 기쁨이 없고, 마음 속 생존의 불안을 안고 사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옛날 대학 시절 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노래로 불렀던 추억이 있다. 50년 세월이 지나, 이 말씀을 다시 읽고, 이 말씀을 실천하며 살 수 있음의 행복을 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