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유일성

기독교의 유일성

김희건 목사 0 07.11 18:56
오랜 지인으로부터 심각한 질문을 받았다. 자기와 친한 사람이 요즘 종교 다원주의에 빠져있는데,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회사의 중역을 맡았던 사람으로, 예수님의 신성, 하나님의 아들 되심,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인하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과 믿음 속에서 마음의 자유를 찾았다고 한다.
미국 신학교에서도 이런 경향의 신학이 가르쳐 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옛날 프린스턴 신학교의 상담학 교수는 수업 후에 나누는 개인적인 대화에서 자기는 예수님이 사생자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런 말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미국 신학교이다. 한국의 신학교였다면, 그런 교수는 당장 쫒겨났을 것이다.
신학교에서 성경의 절대적 권위나 예수님의 하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하는 강의를 하니, 그런 신학의 한 가지 영향으로 미국 교회가 쇠락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될까? 17세기 신교, 구교의 다툼과 전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확신을 잃어 갔다. 그 빈 자리에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들어왔고,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그 계몽주의도 오래 가지 못했다. 독일의 Helmut Thielicke라는 신학자는 그 이유로 사람의 죽음의 문제를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 인간의 이성으로 세워진 사고 체계로는 사람이 죽는 문제를 대답할 수 없었고, 그것이 계몽주의 쇠락의 한 가지 이유였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확실하게 대답해 주는 것은 바로 성경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한다. 불경을 읽는 사람들은 그 내용이 쉽게 이해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책이기 때문에, 사람의 이성으로 깨닫지 못하는 말씀들이 많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 주셔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생명과 구원에 이르게 된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그말의 의미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을 알아보고, 성경을 믿는 일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있다는 것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일찌기 하나님이 그 사람을 그런 용도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기 전에, 그는 버림 받은 사람이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신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고, 감사할 것이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해괴한 논리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 특히 이 세상의 삶의 여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한 사람들, 고통과 죽음의 현실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절망을 절실히 깨닫는 사람은 손을 내밀고, 하나님의 구원을 환영한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지만, 모든 사람들의 종교가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인간의 허약함을 아는 사람, 자신의 존재가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인 것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손을 내밀고, 성경을 듣는 귀가 열린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확신, 성경이 인간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의 믿음 안에서 체험되어 진다. 하나님 편의 계시가 있어야 그 말씀을 듣고 응답할 수 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항상 살아 있는 분으로, 그 하나님의 존재를 떠나서는 삶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말한다. 하루 하루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 손으로 붙들어 주신다는 이 말씀과 믿음이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디딜 수 없다는 고백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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