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으로 끝을 미리 보고 사는 삶을 가리켜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부른다. 신앙 생활은 사실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고, 이 세상의 종말을 미리 바라 보고, 장차 주님 앞에 서서 자기의 삶을 고백하는 그 날을 미리 보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던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몹시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 모이기를 힘쓰고, 배우고, 나누고, 서로 통용하며 살았고, 전도에 힘썼다. 그들은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을 기대하면서 그렇게 신나는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다.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고 나태해 지는 삶을 살기 쉬운 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주님의 종말의 가까움을 증거하며 본인 자신도 선교의 삶을 위해 열정적인 삶을 살다 먼저 떠나갔다. 나태한 교인들도 자신의 죽음이 가까움을 의식할 때, 정신을 차리는 것 같다. 고난이 없는 삶은 신자를 자칫 나태한 삶으로 끌어가기 쉽다.
교인들을 일깨우고 정신차리고 그 종말의 날을 준비시켜야 할 교회 지도자들이 성공과 물질의 가짜 복음을 전함으로 교인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잠을 자고 세상에 정신을 팔게 하는 것은 큰 죄가 아닐 수 없다. 장차 주님의 분노가 그런 거짓 목회자에게 쏟아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오래 전 야외를 걷다가 사람이 지나가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풀밭 위에 서있는 다람쥐를 본 적이 있다. 서 있다기 보다는 얼어 붙어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사람이 지나가면 쏜살같이 달아나던 다람쥐 아니었던가? 그런데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다니?
다람쥐가 쳐다 보는 나무를 올려다 보니, 거기 매 한 마리가 가지에 앉아서 다람쥐를 노려 보고 있었다. 이 가련한 다람쥐는 매를 보고는 얼어 붙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던 것이다. 도망갈 기회를 잃어 버린 것이다. 다람쥐는 사람보다 매를 더 무서워 했다. 한참을 지켜 보다가 지나가야 했다. 다람쥐는 그 시간에도 그대로 서 있었다.
그 경험이 오래 남아 있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응시하며 살고 있을까, 묻게 된다. 우리가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바라 보고 응시해야 할 사건이 앞에 있다. 그것은 언젠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심판의 주님 앞에 서서, 자기 삶을 일일이 고하는 날이 있다는 것이다(롬14: 12):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 하리라." (벧전 4: 5도 동일한 말씀이다)
신앙 생활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라면, 마지막 주님 앞에 서는 그날을 미리 바라 보고 준비하는 삶이라 말하고 싶다. 사람은 평소 무엇을 바라 보는가에 의해 영향받고 살게 된다. 눈 앞에 별별 일이 벌어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돈과 권력을 바라 보고 좇아가는 사람은 없을까?
가장 가관인 것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기 이익을 찾고, 자기 성취를 찾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보면, 마음이 착잡하다가도, 그 사람 넘어 주님 앞에 서는 날을 보면 머리를 들고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우리 눈 앞 무엇을 보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살고 있을까? 그날을 미리 바라 보는 사람은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을 판단하고 갚으시는 분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신 주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우리 앞에 맡겨진 삶을 살고 있다. 내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선용하고 살 것인가, 각자 책임적인 삶 뿐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는 우리가 간섭할 바가 아니다. 주님이 판단하시고 보응하고 갚아 주실 것이다. 우리는 다만 내 자신이 주님 앞에 서는 날을 미리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미리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