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님 부활 3경

우리 주님 부활 3경

조정칠 목사 0 2023.04.02 17:46

펴 기

                                  

이 글은 내 나이 89에 놀며 살기가 황송하여 한 줌 보은이라도 한다고 이런 글을 쓰노라고 자벽한다. 인간은 조물주께서 흙으로 빚으시되 만물의 영장으로 삼으셨으니 필경 내세 천국도 기대할 만한 것이 인생의 지분이 아닌가 싶다. 그런 기대가 곧 부활과 직결된다는 생각이 우러났다. 

                          

나는 살면서 고마운 분들에게 보답하는 인사를 ‘우린 천국에 가서 함께 삽시다’라고 인사하는 것이 즐거웠다. 우리말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의 어감이 정말 좋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살았을 적에 부활을 꼭 전해주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에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부활은 설득하기가 무척 어렵다. 하지만 내가 믿는 대로 전하기는 어려운 것이 없을 것 같아서 부활을 논리가 아닌 사실적으로 적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가급적 신학 교리가 아닌, 부활 3경이란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다. 나의 재주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 자명하니 나의 신앙 양심과 사명감, 이웃사랑으로 호소를 하려는 것이다. 


제 1 경 특급 장례

  

인간을 하늘나라로 인도할 길을 닦아 주시려고 자기 목숨을 제단에 바치신 우리 주님께서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시려고 십자가에 달려서 인간의 죄 문제를 자기 목숨과 바꾸셨다. 모든 인간은 죄를 짓고 산다. 그래서 속죄양 되신 주님을 믿고 영원한 저세상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면 싫어할 이유가 없다. 혹여, 믿어서 뭘 하나 싶지만 믿지 않으면 또 어떻게 되나, 그것도 한번 생각할 줄 알아야 사람답다. 이런 결단은 단 한 번인데 거부할 일이 아니다. 


우리 주님은 유대인들의 시기와 질투로 없는 죄를 뒤집어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셨다. 


그러고도 유대인들은 더 잔인한 계획을 또 세웠다. 십자가에서 죽은 시신을 땅에 버리면 그 시신을 얼른 탈취하여 그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서 부활을 절대 못 하게 할 음모를 꾸몄다. 그런 흉계를 눈치를 챈 요셉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분은 당시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그분은 선수를 쳐서 유대인을 제치고 로마 총독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가 맡겠다고 요청을 하자, 즉시 로마 총독의 재가를 받아 그 시신을 인수했다. 유대인의 잔인한 흉계는 거품이 되었다. 요셉은 의롭고 부유한 최고 의회 회원이다. 감히 누가 예수님 장례를 방해하지 못할 거물급 인사였다. 주님의 시신을 안전하게 인수함으로 주님의 부활은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 장지도 요셉이 쓰려고 준비한 자기 재산을 선뜻 제공했다. 


그러자 유대인은 한층 더 강렬하고 난폭하게 반항했다. 부활을 봉쇄할 막강한 군대를 동원하여 무덤을 완전 포위를 계획했다. 그들의 작전은 부활하여 나오거든 즉시 척결하도록 명령이 내려졌다. 그런 중에도 요셉은 상상할 수 없는 과분한 장례를 장엄하게 치른 것이 부활의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한편 군대가 포위한 묘지 근처에는 누구도 접근될 수 없었기에 유대인은 승리를 장담했다. 드디어 하룻밤이 지났으나 아무 소동이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 날 밤이 지나면 곧 부활의 시작이다. 군대가 결사적으로 무덤을 지켰다. 그런데 그다음 상황은 아무도 모르는 이변이다. 3일이 닥쳤을 때 상상치도 못할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을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을 어떤 역사에도 언급이 없었으나 주님은 아무 소리도 없이 부활하셨으니 이런 거대한 사건을 모르고 있다면 큰 손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제 2 경 부활 배경


크고 놀라운 이변은 예수님 부활이 시작되는 3일이 되는 순간에 폭발했다. 그 무시무시한 군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로 추방됐는지 목격자가 없다는 것은 부활의 위대함을 직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인간의 개입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예수님 지지자들이 그렇게 하기는 만부당하다. 누굴까? 스스로 철수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살벌한 군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수수께끼로 풀어도 될 수 없는 일이다. 

결정적인 D 데이 새벽 3시에 예수님은 확실하게 부활하셨다. 철저하게 막혔던 무덤 입구의 바윗덩어리도 흔적도 없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텅 빈 무덤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것은 도대체 무덤 내부의 온도를 누가 조율하여 부활을 할 수 있었는지? 무서운 군대는 어떻게 살아졌는지 알 도리가 없다. 짐작건대 사람의 개입으로 한 것은 결코 아닌 것은 확실했다. 생각이 닿는 곳은 단 한 가지뿐이다. 

   

3일 전 예수님의 사망과 동시에 동반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사람이 아닌 태양이었다. 사람이 논할 수 없는 영역의 태양이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낮 12시에 태양이 동시 투항하여 사방이 깜깜했다. 그 후 3시간 만에 태양은 다시 살아났다. 그날 낮 12~3시 태양의 태도가 부활의 날 밤 12~3시간 태양이 무덤의 온도를 조율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황금 옷을 입은 태양, 흑색 상복을 입은 태양, 그리곤 녹색 옷을 입은 태양이 있었다. 산과 들의 초목을 녹색으로 생명을 보장하듯이 부활의 주님도 보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 태양과 주님은 공통 분모가 있다. 태양의 기능 중에 생명 보장이 있듯이 주님께서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태양도 연도를 알려주고 주님도, 2023 AD 년도 서로 통한다. 그렇다면 부활의 배경은 태양이 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 이런 것은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진리의 영역에 속한다. 나는 그 녹색 태양을 스케치하여 부활의 현장을 공개하고자 한다. 내가 쓴 28백서라는 책에 게재하였으니 여기서도 한번 공개 해 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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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태양지복(綠色太陽至福) 


제 3 경 명작 153 


말로 할 수 없는 온갖 흉계를 무릅쓰고 주님 혼자서 예정된 부활을 성공하셨다. 그리고 곧장 갈릴리 바다로 제자들을 만나시려고 행차하셨다.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았으나 제자들의 고깃배가 희미하게 눈에 비쳤다. 예수님은 그쪽을 향하여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고기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셨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은 즉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고기가 153 마리나 잡혔다.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자기 스승을 몰라보았다. 해변에는 뜻 밖에 모닥불이 피어 있었고 조반도 차려져 있었다. 제자들은 할 말을 잃고 묵묵히 동작만 했을 뿐 침묵 일관이었다. 


그날은 오직 153 외는 아무 말씀도 아무 일도 없었다. 조반 후에 제자들과 회동은 가졌으나 부활의 언급은 없었다. 주님께서는 고도의 감각으로 부활의 정황을 153에 깊숙이 심어 주셨던 것이 그날의 압권이었다. 153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정보와 목적이 담겼다. 153 아니면 부활을 알 수 없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 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다”라는 말씀이 153에 해당되는 말씀 같다. 153을 제자들 손에 쥐여 주신 것을 모르면 주님께 실망을 끼치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도 우리들도 그대로 153을 외면한다. 시간이 몇 세기가 지나도 153은 항상 그 자리다. 주님 부활의 확실한 증거임이 틀림없는 특별하신 배려였건만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 시대가 그것을 판독할 할 수 없다는 것이 심히 마음 아픈 일이다.


그날 주님은 153을 발견한 것이 결코 아니다. 부활이 얼마나 귀한지 아주 많이 구상하신 선물로 알고 받아들였어야 옳다. 그렇지 않고 153을 우연한 일로 취급하는 것이 실망스럽다. 구하고 찾고 두들기는 원칙은 뒷전이고 대충대충 살아가는 방만한 시대가 주님께 죄송하다. 귀한 것은 예쁘게 포장한다. 153은 부활을 포장한 명작 중 명작이다.

  

나는 70살에 목회를 은퇴하면서 牧師를 사양하고 牧事 옷을 입었다. 마침 설교할 교회가 있어서 하다 보니 18년이 되었을 때, 코로나 방역으로 교회 문을 닫던 그날 교회를 사임했다. 그 후로는 집에서 지내면서 10여 권의 책을 쓰기도 하면서 밀려 있는 성경 숙제를 풀면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처음부터 주님의 포도밭 일꾼으로 출발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부와 농부 즉 일꾼으로 써 주셨기 때문에, 일 事가 적합하여 牧事로 살고 있다. 얼마 전엔 예수님의 새벽별을 모형으로 짓기도 하였고, 요즘은 예수님의 처음 표적을 모형을 만들면서 지낸다. 일꾼은 무슨 일이라도 하면서 산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 부활 153을 묵상하던 중에 감탄하여 153에 열중하게 되었다. 주님의 탁월하신 쉽고 기발하신 기법을 알고자 스스로 눈높이를 낮추고 보니, 153중에 '3'이란 초점이 보였다. 곧바로 153351로 방향을 돌려서 보니. ‘3’은 부활의 날, 3일 다음 ‘51’은 시간이었다. . 결국 ‘351시간이 부활이었다. 51은 무덤에서 잠잔 시간이었다. 장례 첫날 24시간, 둘째 날도 24시간 주무셨다. 48시간 다음날 3시에 부활하셨으니 48+3=51시간이 주님은 우회적으로 351153으로 하여 구하고 찾는 수순을 밟아 스스로 확인하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꼭 죽은 지 몇 시간에 깨어났는지 확인한다
. 이런 경우가 정신이 정상이다. 부활은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 증명하신다. 주님은 153으로 부활을 증명하심으로 내 멍에는 가볍고 내 짐은 쉽다는 진리를 누구라도 쉽고 편하게 알도록 153이란 오묘하고 원만한 방식으로 증명해 주셨다.

접 기
 

여기서 접는다
. 153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잡은 고기의 숫자였을 뿐 기록이 아니다. 어부가 숫자를 정해 놓고 그물을 던질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다. 그렇게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부활 역시 있으려야 있을 수 없다. 그래서 153이 주님으로부터 탄생 된 격조 높은 비법이라고 접수하면, 인생 성공을 노래할 날이 많을 것이다. 있을 수 없는 것을 임의로 충족시켜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 영원한 상급이 될 것인즉, 부디 때 놓치고 후회하는 일 없기를 빌면서 이만 접는다!

불초 종 조 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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