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언어 생활)
글: 정관호 목사(뉴욕만나교회)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서 1:19-21)
언어생활의 중요성
그리이스(헬라)의 제노(Zeno)라는 철학자는 “사람은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뭐 그따위 말이 그리 대수로운 말이냐? 뭐 유명한 말이냐?”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말이란 누가 하느냐에 따라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눈은 둘이요 귀도 둘이요 코는 하나요 입은 하나요”하는 초등학교 1학년 음악책이나 동요에나 나올 그런 아주 당연한 말을 촌부나 지나가는 행인이 아니라 다름아닌 철학자가 말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만큼 한번 두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은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다.”라는 말은 상대방이 자기에게 말을 할 때 그 말을 귀담아 잘 들을 것이며 반면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는 아주 신중하게 말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도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속담이 있고, 서양 격언 중에도 ‘웅변은 은이나,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 모든 속담이나 격언도 우리의 언어생활에 주옥같은 교훈을 준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총회 신학대학원에 갓 입학했던 때는 바로 1980년도였습니다. 1980년도! 바로 그 해가 1979년 12.12사태로 군사 구테타를 일으킨 전두환씨를 비롯한 군부가 5.17,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불러일으킨 자들을 탄압하여 정권을 찬탈한 해였습니다. 그러니 시국이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그뿐 아닙니다. 그때 학원이나 대학교나 신학교 모두 학내의 비리, 부패 사건으로 인해 연일 데모가 일어났었는데 제가 입학했던 총회신학대학 역시 기숙사 부정사건, 학내비리, 교단 교권의 비리 등으로 엄청난 시련기였습니다. 신학생들은 회의차 교내로 들어온 신학교 이사들의 자가용차를 뒤엎어 버리고, 이사들과 교수들을 감금하는 사태까지 나타났습니다.
그때 (고)박윤선 목사님께서 Chapel 시간에 바로 이 본문을 갖고 설교한 것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특히 격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의분’에 흥분되어 과격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신학생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분의 ‘신앙인격’이 그런 와중에서 신학생들에게 참다운 성경적인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 후 박윤선 박사님은 ‘침묵정진’,‘여주 동행’이란 유명한 4자성어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생긴 해프닝
교회 크리스마스 파티 때 ‘Oh, holy night(오, 거룩한 밤)’이란 노래를 솔로하셨던 분이 노래하다가 실수한 부분이 있을 때 그분 스스로 너무너무 못 불러 미안하게 되었다고 좌중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여러분도 ‘말’ 때문에 실수한 적이 있을 겁니다. 솔직히 저 역시 ‘말’ 때문에 실수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물론 고의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식사하던 중 제가 좌중에 웃음을 주기 위해 그냥 던진 말 때문에 교회에 자그마한 파문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알면 됐어요.”라고 joke로 던진 말 한마디 실수(?)로. 물론 고의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으로 노래하였던 그분에게는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나오지 않겠다느니, 교회를 옮기겠다느니’라고 한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실수로 그만 그렇게 되었으니 잘 이해하고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정중한 사과와 요청에 그분도 잘 받아 주어 그 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그 가정은 NJ로 이사한 후로 본교회에는 출석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특별히 아주 가까이 지내는, 지내야만 하는 사이에서 더 빈번히 발생합니다. 참으로 서로 조심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이란 의사소통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수단입니다. 말은 그 말 자체에 ‘사상’과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지혜롭게 잘하면 그 ‘말’은 듣는 사람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와 힘이 됩니다. 우리는 말을 통해서 서로 갈라섰던 사람들이 용서하고 용납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토록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말’을 잘못하면, ‘말’을 잘못 뱉어 놓으면, 참으로 수습하기 어려울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말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고, 헤어지고, 비난하고, 더 이상 다시 못 볼 철천지원수 사이로 전락하는 것을 봅니다.
악의 없이 하는 말도 조심해야
우리는 악의 없이 하는 말도 때로는 조심할 필요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솔직한 사람이야. 나는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담아두지 못해’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양 말하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물론 좋습니다. 그런 사람이 속에 있는 것을 감추는 ‘음흉한(?) 사람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그래도 자신이 솔직하다고 말을 할 때도 ‘성령의 다스림, 곧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지배)’ 가운데 이야기를 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려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단독 목회하기 이전에 저는 한국에서 가장 큰 대형교회 중의 하나인 충현교회를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자그만한 소형교회보다는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대형교회’ 다니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도 한때 그러하였습니다. 반면 자그마한 ‘소형교회’를 다니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체로 자그마한 교회 다니는 교인들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 이름을 자신 있게, 확신 있게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야말로 소속감이 분명한 ‘사랑의 공동체’, ‘가정 같은 교회’를 이루어 나가기에 가장 알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처음 오는 분들이 뉴욕만나교회는 참으로 가족 같은 분위기 좋은 교회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더욱더 이와 같은 가정 같은 교회,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 사랑이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더욱더 우리의 신앙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되는데 특히 말하는 데 있어서 은혜를 끼치는 삶,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지혜롭게 말을 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작은 교회에 출석하기를 꺼려하는 줄 아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커다란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사생활(privacy)’이 노출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큰 교회에 주일예배, 그것도 뒷자리에 앉았다 빠져나오면 그 누가 뭐라는 사람, 상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교회를 나가면 함께 예배하고,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 사생활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정말 부담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존 교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하는 것들이 새로 교회에 온 그 사람에게는 당황스러운 질문일 수 있습니다.
나이가 4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어느 여신자가 함께 주일예배에 참석한 후 식탁 교제에 참여했다고 합시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말로 또 대화를 여는 수단으로 여러 가지 주변적인 이야기를 질문형태로 던질 수 있습니다. ‘결혼하셨을 텐데, 아이가 몇이나 되십니까?” 너무나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 새 교우가 그 나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다거나, 별거 중이거나, 이혼을 하였다거나, 자녀가 전혀 없는 자라면…, 그 여자분은 그 단순한 질문 하나에도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여자분 자신의 영적, 정서적 태도도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렇게 마음이 상한 사람은 대번에 교회 갔다 오히려 마음에 상처가 입고 왔다고 하면서 다시는 그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 –가정에서는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녀ㅡ, 교회에서는 성도(교인)들 사이, 직장에서는 주인이나 동료직원, 친구, 이웃 등과 대화할 때 참으로 지혜있게 처신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본문이 주는 교훈
오늘 야고보서 1:19-21의 본문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을 듣고, 해야 될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말을 듣는 것이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첫번째, 듣기를 속히 하십시오.
‘사람마다 듣기를 속히 하고’에서 ‘듣는다’라고 할 때 듣는 것은 우선 1차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야고보서1:18에 있는 진리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가리킵니다. 지금 야고보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그리스도인이 된 형제들과 자매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만 이런 교훈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 형제자매들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교훈을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고, 또 당연히 알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속히, 신속히 들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법칙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읽고 또 들어야 합니다. 여기 듣는다는 것은 단지 ‘귀로 hearing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귀 담아 듣고, 삶에 적용하고, 실천에 옮기는 믿음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으십시오. 지체하거나 미루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특히 주일예배, 수요예배, 새벽기도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 Q.T.)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주 좋은 기독교 서적들, 그것이 신학 서적이건, 경건서적이건, 신앙간증서이건…그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은 priority, 여러분 삶의 최우선 순위를 여기에 두셔야 합니다.
제가 아주 잘 아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친구인 박영덕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제가 목회할 때 제가 시무하던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던 분이셨습니다. 그는 KAL(대한항공) 남자 승무원이었는데 승무원 가운데 가장 높은 직책인 사무장 직분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가 제게 이렇게 신앙고백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정목사, 난 말이야, 비행기 안에 있을 때나, 비행이 끝나 호텔에 있을 때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우선 영어공부를 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지,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그때서야 성경을 띄엄띄엄 읽었어. 그런데 이제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을 읽지… 그런 후에 시간이 남으면 영어 공부를 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날마다 읽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이 날마다 자라나, 예수님을 닮아가는 거룩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창조주, 구속주, 섭리의 주이심을 발견하는 사람,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나의 주님과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 성경에서 ‘내 어둔 영혼을 밝히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죄악을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여, 교만이 변하여 겸손케 하시며, 성도의 교제와 주님을 섬기게 하는 삶이 복된 것을 깨닫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이 얼마나 소중한 은혜를 체험해 나가는 사람입니까!
여러분,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펼쳐서 읽으며 묵상하며, 사색하는 사람이 되어 가십시오. 이것이 듣기를 속히 하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입니다.
둘째, 말하기를 더디하는 자가 되십오.
(충청도 사람이 되십시오. ~~유!, 씨유!) ‘사실 듣기를 속히 하는 자’ 곧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속히 하는 자는 자동적으로 말하기를 더디 합니다. 그것이 지혜인 것을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회 시간마다 ‘잠언’을 통해 삶의 교훈을 얻으며, 기도제목을 삼은 적이 있습니다. ‘잠언’처럼 말과 언어생활에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유익한 교훈을 주는 성경책도 드물기도 합니다.
잠언 10:19에는 이런 경계의 말씀(잠언)이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또한 잠언 20장에도 이런 경계의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20:10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잠언 20:15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어떤 사람을 만나면, 말하는데 얼마나 굶주렸는지, 상대방의 이야기는 들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계속 늘어놓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참으로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 지혜가 부족한 사람, 아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의 3대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세마디 듣고 한마디 말하기, 3분 듣고 1분 말하기, 세가지 듣고 한가지 말하기’가 대화의 비결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저도 제 자신을 늘 경계하고 있습니다만, 대체로 나이가 들수록, 노인이 될수록, 말이 많아지고, 또 같은 말,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말 많은 사람은 ‘자기가 말 많은 줄을,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줄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제어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했군요. 아니 제 이야기만 한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만나면 좀 자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에 만나서도 여전히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구절(약 1:19) ‘말하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에 대해 결정적인 언급이 구약성경 전도서 5:2-3에 나타나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세째 성내기를 더디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나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자, 또 급히 말하는 자가 화도 쉽게 냅니다. 성내는 일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그것이 의로운 분노(의분)라도 그렇습니다. 의분 역시 원래의 의도를 떠나 악으로 변질될 수 있으며, 또 ‘죄’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 가운데 이런 죄악된 요소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성을 내지 않기 위해, 분노를 표출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①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코람 데오(Coram Deo), -before the face of God-,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 크고 높으시고 전능하신 분, 빛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다 해도 또 양심에 꺼리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여전히 ‘죄인’이며,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면전에 있다는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가지십시오.
② 성령의 충만(성령의 다스림)을 받으십시오. 순간순간 받으십시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 말씀은 성령의 지배, 다스림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본성에 내맡겨 두지 마십시오. 성령의 통제를 받으십시오. 성령의 역사(works)에 민감하게 반응하십시오. 성령께서 원하시는지, 그렇지 않은지 물어보시면서 살아가십시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할 것 없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또 여러분 자신의 거룩함도 드러내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말을 내어 버리십시오.” 더 나아가 능히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십시오.”(약 1:21)
이제부터라도 여러분들의 삶, 특히 언어생활에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해서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평화의 삶’을 살아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 2022년 12월 14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8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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