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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 성전된 몸

복음뉴스 0 2022.11.17 18:23

제목 : 성전된 몸 요 2:21

: 이윤석 목사(NY 부르클린제일교회) 

 

[들어가며]

 

종교적인 절기들은 대개 카돌릭이 만들어 놓은 미신적인 소산일 때가 많다. 성탄절도 그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성탄절은 우리 모두에게 가치가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이 우리의 관심을 복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영광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날자가 이교도적 습관이든지 아니든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서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간을 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이해함으로 은혜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1.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예수님 자신의 인격에 관한 것임을 분명히 알자!

다른 많은 종교들은 주로 가르침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가르침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기독교의 가르침의 내용도 사실은 모두가 그분에 대한 것이다. 우리 신앙관, 구원관, 세계관은 그분이 결정하시고 그분에게로 돌아간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모든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도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 근본적 해결원리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최우선적인 질문은 너희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시냐 하는 것이다.

 

1) 사람들은 소위 신학, 학문이란 이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평가한다.

그래서 늘 새롭고 굉장한 것을 발표한다. 교회 역사가 그렇게 이어져 왔다. 그러나 결코 새로운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학문은 특별한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왜 그런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보다 더 분명한 학문이 나와서 전에 것을 취소해버리고,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도 대중 매체들이 그 일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그런 얕은 기초 위에 세울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2) 우리는 놀라운 발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거나 겁낼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사본이 발견되었거나 예수님의 성의가 나오면 떠들썩하곤 한다. 고고학을 통하여 노아 방주를 보니 실제로는 이렇게 생긴 것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말들에 대해서 흔들릴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그런 정보들은 조금 시간이 지나면 또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이천년 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 약속대로 결코 변치 않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 곧 그분이 어떻게 사셨고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미 이뤄진 신약과 수많은 예언의 말씀인 구약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한 말씀, 이루어진 말씀, 하시는 말씀을 신뢰하고 공부하고 성령으로 더욱 견고하게 세워져가자!

 

3) 그분은 누구신가?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아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복되신 성삼위 하나님 중에 두 번째 위격이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신약 기록자들을 사기꾼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 분명한 사실에 대해 믿든지 거절하든지 택일해야만 하는 것이 신앙이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심에 대해 성경이 얼마나 분명하게 말하는가! 우리는 성도로서 항상 이런 말씀에 절대적 확신을 가지자!

 

2. 본문을 더 깊이 이해하자. 본문은 분명히 보여주시려고 성전된 몸에 대해 말씀하신다!

우리는 유월절에 예수께서 어떻게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는가를 보았다.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았다. 나아가 그들이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 하셨다. 이에 당황한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며 충격을 받았다.

 

1)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21절에 그러나 J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첫째는 문자적으로 물질적인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다는 것이요, 둘째로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성육신할 때 일어났던 놀라운 교훈을 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의 그 큰 성전이 자신의 형체, 몸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2) 우리는 출애굽기의 성막과 레위기의 5대 제사를 잘 알고 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에 걸쳐 구약 예배, 성막, 제사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는가? 성전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많은 분량에 걸쳐 말씀하실까? 그것은 성전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들어가실 몸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감격과 감사로 성전을 만들고 봉헌 기도를 한 것을 보라. 그는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일 년에 한 번 씩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온 몸으로 실감하면서 하나님께 감격의 기도를 드린다. 이때 성전이 얼마나 위대하게 보였겠는가! 이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건축되었다.

 

3) 요한은 이 의미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한다. 무엇을 위해서일까?

이 사건이 성육신, 곧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에 대한 빛을 주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이시지만, 그분이 바로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어린 아이로 구유에 누우신 그 아기의 몸이 바로 아들의 인격 속에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처소이다! 사도요한은 성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이 본문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성막을 치시매라고 읽는 것이 더 정확하다. 우리의 몸처럼 주님의 몸도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는 일종의 천막이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사 거하시는 장소 이상의 의미다. 구약시대 성막과 성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처를 뜻하는 것처럼,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몸도 하나님의 거처를 뜻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1:1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2:9)” 성전된 몸으로 오셨는데, 그 몸 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하나님 되심의 모든 넘침이 예수님 육체 안에 계신다.

그런데 이것을 구약성경에도 이미 예고해주셨다. 사야 7장이 그분이 처녀,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그분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불린다고 말씀한다(7:14). 신약의 첫 장은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일러라(1:23)” 지금도 우리와 하나님이 만나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4) 그러므로 주님이 자신의 몸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의미가 무엇인가?

주님은 성전은 바로 나다! 이 몸이 바로 성전이다! 내가 이 성전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너희가 만나는 장소다!” 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보았느니라(14:9)”라고 말씀하셨다. 영존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은 이 장막 곧 성막에 계시는 아들의 인격 안에 하나님 자신의 거처를 삼으셨다. 그래서 바울이 감격스럽게 외친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러므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딤전 3:16).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다는 뜻이다. 옛날 성전에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셨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혈과 육, 곧 인간의 형체인 구유에 누이신 아기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의미다.

 

3. 성육신에 따르는 신비의 요소를 살펴보자.

1) 사람들은 주님과 질문, 답변하고 기적을 행했는데도 그를 알아보았을까?

바울 사도는 선포한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이 한 사람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성전만 보고, 그 안에 거하시는 그분은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진정한 영광과 거룩한 경이와 신비를 보지 못한다.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기 때문에 요한이 이 말씀을 하는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한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다. 기적적인 일, 초자연적으로 우리 이해를 초월한다. 세상이 결코 그를 알지 못했다. 왜 그런가? 선입견 때문에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성전을 위대하게 생각하니. 앞으로 그럴 것이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을 말씀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9)”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도무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2) 우리 신앙생활을 위해 바울은 디모데에게 실제적인 권면을 말씀한다

디모데전서 61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돈을 사랑하지 말고 믿음의 선한 싸움 싸우고 선을 행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결론적으로 주시는 말씀이 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그분이 바로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으로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믿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자연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실재다. 그래서 사도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딤전3:16)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솔로몬과 헤롯이 지은 성전은 웅장한 건물이다. 그 웅장한 건물을 짓고 말씀드린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그런데 신성의 충만함이 한 작은 인간의 몸에 갇히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정확하게 일어났던 일이다.

 

3) 그 한 아기 속에 두 본성, 오직 한 인격이신 예수님이 계신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다. 두 본성이 섞여 있지 않다. 인간이시며 하나님, 둘은 완벽하시다. 절대적 사실이며, 혼합되어 있지 않다. 그러기에 똑똑한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이해할 수도 없다.

복음서를 보면 늘 숨겨지는 것이 있다. 계시의 진리가 은폐되어 진다. 본문도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했는데, 이것은 신비이다. 주님은 지금 성전과 자신에 대해 동시에 양쪽 측면을 말씀하신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영광을 드러내실 때도 있고 숨기실 때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항상 두 종류로 나뉘어졌다. 첫째, 어떤 사람은 무엇인가 감지하고 느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광의 그림자가 있음을 알고 믿고 감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둘째는 많은 이들은 성전과 육체, 외형적 모습 외에 아무 것도 못 보았다.

 

4) 왜 그러한가? 여기에는 능력과 약함이 놀랍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분이 누구이신가? 갈릴리 가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다. 말씀의 권위로 성전을 청결케 하는 권세자이시다. 또 예수께서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사람 속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그분은 연약함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여기 신비가 있다. 불가사의하고 놀라운 진리가 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신비이다.

 

4. 성육신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제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는 시금석이다.

1) 우리는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 몸을 넘어뜨려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하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친히 예언하신 것이며, 이 때문에 주님이 오신 것이다.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놀라운 교훈과 모범을 보이시기 위함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2:9)” 그는 천사보다 약간 못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베들레헴 아기로 탄생했다. 천사들을 지으신 분이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다. 왜 그런가? 죽음의 고난 때문이시다. 그런데 그 성전이 파괴될 수 있도록 성전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가 지금 장차 그 건물이 무너지고 파괴되어, 돌 하나 돌 위에 겹쳐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건물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러므로 이제 이것은 우리가 언제나 살고 또 거주해야만 될 그 건물이다.

 

2) 그가 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으며 왜 오셨는가?

본문이 그 답변이다. 그는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새 방법을 소개하려 이 땅에 오셨다. 새로운 언약, 새로운 시대를 소개하려 오셨다. 그가 예언하신 대로 성전은 파괴되고 무너지고 말았다. 실제 주님께서 죽으실 때 성전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27:51). 지성소로 구별되었던 장소, 휘장이 모든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찢어졌다. 지성소가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구약 시대를 종결키 위해서 오셨다. 성전은 영원히 무너졌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모든 것이었고 자기들의 가장 귀한 가치였었다. 그러나 주님은 성전이 일시적인 것을 가르치고 싶으셨다. 지금도 예루살렘 성전 회복을 가르치는 분이 있고, 그것을 위해 모금운동도 하며, ‘예루살렘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운동을 펼치는 분들이 있다. 그것은 결코 복음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 의식과 예전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왜 그런가? 주님은 그것의 종말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의 몸으로 부수어 버림으로 단번에 영원히 그 일을 행하신 것이다.

 

3) 몸으로 오신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을 만날 새로운 장소를 공급하기 위함이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시지 않으신다(17:24). 우리는 이제 그의 아들의 인격 속에서 그를 만난다. 그 아들은 자신의 몸인 성전으로 오셨고, 또 그의 몸이 일으킴을 받으셨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다시 취하셨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그분은 화해자이시며 대제사장이시며,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시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셨다. 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길은 그분 안에만 있다. 그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할 수 있다.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곳은 전적으로 복되신 예수님의 인격 속에 있다.

 

4) 예수께서 하신 일의 결과, 이제 우리가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우리 주님은 다시 오사 이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울 사도는 말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1:23).

우리 교회 성도들이 누구인가?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가르쳐준 진리, 예수를 머리 삼고 세워져가는 자이다: “그의 안에서 건물 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1.22)” 우리가 주님 사랑하여 그 말씀을 따라갈 때, 주님의 분명한 약속을 기억하자! 이제는 우리 몸, 우리가 하나님의 거처,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14:23) 이것이 주님이 이 땅에 몸으로 오신 결과이며, 우리에게 주신 영광이다.

 

[나아가며]

이제 교회가 그의 거하시는 성전이다. 그 이상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주님이 영으로 거처를 삼으신 성전이다. 이것을 날마다 인식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참으로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성령으로 인해 더 깊어져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으로 우리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의 한 부분인 것을 늘 망각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주님이 믿음으로 우리 안에 거하심을 실재로 깨달으며 살되,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해야 한다.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고, 함께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자!

 

* 2022년 10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7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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